2008년 08월 04일
이효리 [It's Hyorish]

흔히들 이효리가 인기를 얻게 된 과정을 언론플레이의 전형으로 이야기하곤 한다. 실체가 없는 것을 부풀려서 꺼지지 않을 정도의 거대한 거품을 만들고, 반복 학습을 통해 마치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믿도록 유도해서 가짜가 진짜가 되었다고 말이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당시 이효리 신드롬은 단순히 입지를 잃어가던 스포츠 신문들과 건수에 메말라있던 연예 매체들의 야단이 통한 사례 정도로만 보기엔 뭔가 안 맞는 구석이 있다. 이효리 이전에 이와 유사한 과정으로 스타가 된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으며, 이후에도 수많은 섹시컨셉 가수들이 비슷한 유형의 언론플레이를 시도했으나 조금이나마 통한 예는 전무하다시피 했다. 거품을 만드는 것도 정도가 있다. 그야말로 대단히 이례적인 경우이자 상식으로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무슨 집단최면에 걸린 것 같았던 신드롬 사태 때 이효리가 오히려 약자였다는 걸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녀가 4개 시상식의 대상을 휩쓸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었고 그건 이효리 본인도 마찬가지였다. 대상을 받으며 전혀 기뻐하는 기색이 아니었던 그녀를 기억한다. 이효리는 이후 인터뷰에서 대상을 받을 때 너무 부끄러웠으며, 부족한 실력으로 그런 상을 받아버려 계속 앨범을 내야 하는지 의문이라고까지 말했다. 애초에 그 사람이 가진 그릇이나 방향에 전혀 맞지 않는 기대치와 과제가 주어진 것이다. 그냥 가볍게 함께 즐길 생각으로, 춤이나 패션 같은거나 보여주려고 앨범을 낸 여가수에게 마치 등떠밀듯 대상을 줘버린 건 지금 생각하면 사뭇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전혀 그럴 능력이나 야심이 없었던 사람에게 왕관을 씌우고 억지로 자리에 앉혀 슈퍼스타 행세를 강요한 것. 실은 이게 당시 불어닥쳤던 이효리 신드롬의 핵심이 아닐까 생각한다.

솔로 활동에 대해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반응이 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이효리가 가장 먼저 선택한 방식은 도피였다. 비슷한 시기에 배우 전업을 선언한 다른 아이돌 가수들처럼 연기로 방향 전환을 시도한 것이다. 하지만 알려져 있다시피 무려 '가수 생활에 회의를 느껴 연기 데뷔했다'는 말까지 남기며 의욕적으로 도전한 드라마 출연은 실패로 끝났다. 그리고 다시 가수로 돌아와야 하는 상황에 처한 시점에서 혼란스러운 행보가 계속된다. 보여줄 것은 별로 없는데 위치는 대형 스타였던 그녀가 단시간에 효과를 낼 수 있을만한 방법은 많지 않았고, 결과는 이벤트의 연속이었다. 통신 회사와 피처링진을 끌어들여 CM송으로 승부를 보기도 하고, 핑클 시절의 동료를 끌어모아 단발성 재결합을 시도하는 등 가능한 모든 방법이 동원되었다. 다시 앨범을 내지 않는다는 소문이 돌았고, 한동안 그녀의 디스코그라피는 정규 앨범이 아닌 디지털 싱글로만 채워졌다.
그러나 결국 어쩔 수 없이 정면승부를 해야 했던 시점이 다가왔고 3년만의 정규 앨범이었던 [Dark Angel] 발표가 이어진다. 그동안 이벤트로만 버티면서 진짜 평가를 피해왔던 대가는 대단히 컸다. 야심작이었던 타이틀곡 'Get Ya'는 최악의 결과를 낳았다. 대규모의 컴백 퍼포먼스에는 혹평이 쏟아졌고, 의상 모방, 립싱크, 표절 등 모든 명분을 동원한 대대적인 공격이 가해졌다. 이효리는 어느새 자신이 가요계의 대표 가수가 돼 버렸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으며 [Dark Angel]은 그런 기대에 부응하려 무척 애쓴 앨범이었으나, 그런 노력은 전혀 인정받지 못했다. 소속사를 옮긴 후 첫 시도였던 뮤직 드라마의 결과는 더욱 안 좋았다. 상업적으로 부진했던 건 물론이고 음악적인 혼란은 가히 극에 달해 있었다. 실패를 만회하고 가창력을 증명하고자 그녀는 소몰이 전문 작곡가들을 대동하고 무대에서 SG 워너비 모창을 하며 소를 몰았다.

믿을 수 없게도, 대성공이다. 타이틀곡 'U-Go-Girl'은 발표되자마자 엠넷에서 최단기간 1위에 올랐고 며칠만에 각종 스트리밍 사이트를 모조리 휩쓸었다. 음반 판매, 스트리밍, 다운로드, 미니홈피 기타 등등 현재 그녀의 노래는 모든 차트에서 1위를 기록중이다. 1집 텐미닛을 능가하는 반응이며 그녀의 가수 활동을 10년을 통틀어서도 가장 대단한 성과다. 3년 전 애니모션 같은건 상대가 안 된다. 뮤직 비디오나 퍼포먼스에 대한 반응도 폭발적이다. 컴백무대가 방송된 후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인터넷 언론들은 일제히 그녀의 무대에 대해 호평을 보냈다. 마치 거짓말 같은 결과다. 원래대로(?)라면 그녀는 외국 노래 차용하고 부족한 가창력 퍼포먼스로 때운다는 비판을 받으며 최악의 평가 속에 컴백을 마무리해야 했다. 명랑히어로 식으로 말하자면 실망의 아이콘, 건수의 상징이었던 그녀가 아니던가. 이게 우리가 알던 그 이효리가 맞는가.
물론 맞다. 우리가 잘 알던 그대로의 이효리이며, 사실은 이게 진짜 이효리의 모습이다. 대체 무슨 얘기냐고? 여기에 대해서 말하기 위해선 그녀의 지난 가수 활동에 대해 다시 한번 얘기해야 한다. 2003년으로 돌아가보자. 마치 전설적인 성공 사례처럼 기록되고 있었지만 '텐미닛'은 사실 실패작에 가까운 곡이었다. 핑클에서 벗어나 이효리 자체로 부각되기 시작하기 시작한 최초의 시점인 '쟁반 노래방'에서 그녀가 사람들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건 섹시하고 육감적인 사람이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이효리의 인기 비결은 정반대에 가까웠다. 솔직하고 유쾌한 분위기와 재치있는 말솜씨, 친근하면서도 부담스럽지 않은 태도. 애교 있는 모습과 예쁜 눈웃음. 이런 면모들은 이후 그녀가 내세웠던 과격한 섹시 코드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다. 이효리가 가수 활동에서 제대로 장점을 보여주고 재능을 살리려면 당연히 이런 이미지를 돋보이게 하는 방향으로 가야 했다.
그러나 '텐미닛'에서 그녀의 그런 장점들은 전적으로 부정되었다. 쟁반을 맞고 눈웃음을 치며, 마음 줄듯 안 줄듯 달아나던 처녀가 갑자기 10분만에 남자들을 다 꼬실 수 있다며 야하게 차려입고 달려든 것이다. 이 곡이 먹히면서 이효리 개인과 가수 이효리의 간극은 급격하게 벌어지기 시작했다. 오락 프로나 CF에서 보여주는 그녀의 이미지가 연결돼 있었던데 비해 그녀의 가수 활동에는 연속성이 없었다. 연예인으로서 이효리는 유쾌하고 친근한 매력을 가진 사람이었고 다양한 패션을 감각있게 소화하는 패션 리더였지만, 무대에서 노래하는 이효리는 10분만에 남자를 갖겠다며 달려들고 밤에 노크를 해달라고 유혹하는 야하고 과격한 여자였다. 밝고 가볍고, 산뜻한 노래를 부를 때 더 돋보일 수 있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대형 가수처럼 포장된 그녀에게는 그런 장점을 발산할 기회가 없었다.
그리고 악순환이 이어진다. 대중이 슈퍼스타에게서 원하는 무게감있는 공연을 보여줘야 했으므로, 신곡을 발표할수록 컨셉은 과격해졌고 어둡고 카리스마적인 이미지가 주를 이루었다. 나의 몸매와 관능 파워로 너를 끝내주겠다는 식의 가사가 난무하고, 무대에서 이효리는 마치 대한민국 최고의 섹시 다이너마이트인 것처럼 굴었다. 굉장한 착각이 오랫동안 계속되었던 것이다. 같은 섹시함이라도 무슨 성인물 배우같은 섹시함과 귀여우면서도 산뜻하며 거부감 없는 섹시함은 다르다. 이효리는 후자를 표현하는데 훨씬 능한 사람인데 매번 노래할 때마다 같이 안 벗고 누우면 죽니 사니 하는 식으로 나오니 점점 재미없어질 수밖에 없는것 아닌가.

의외로 해답이 가까운 곳에 있었던 셈이다. 이것은 슈퍼스타의 위치를 강요받아왔던 그녀가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돌파구이자 접점이었다. 예상을 뒤엎고 앨범 [It's Hyorish]가 폭발적인 호응을 얻고 있는 비결이 여기에 있다. 타이틀곡 'U-Go-Girl'은 그녀가 가수로서 진정 섹시한 매력을 보여주는 지점이 어디에 있는지를 아주 정확하게 짚어냈다. 이 곡의 최대 장점은 컨셉 송이 아니라는 것이다. '텐미닛', 'Get Ya', '톡톡톡'등 그녀가 기존에 불러왔던 노래의 주인공은 이효리가 아닌, 그 곡 안에서 만들어진 가공의 인물들이었다. 하지만 'U-Go-Girl'의 화자는 이효리 자체다. 이 곡에서 그녀는 우리가 예능 프로에서 그동안 봐 왔던 고유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등장한다. 이효리가 예능이나 인터뷰에서 남자를 10분만에 유혹하겠다느니, 오늘 밤은 너의 것이라느니 하는 말을 하지 않으므로 당연히 이 곡에서 이효리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이효리는 노래를 듣고 있는 여자들에게 어떻게 하면 자신처럼 될 수 있는지를 조언하며, 트렌드 세터이자 패션 리더로서의 위상을 뽐낸다. 뮤직 비디오와 안무는 곡에 어울리는 발랄하고 산뜻한 모습으로 연출된다. 무대에선 어둡고 작위적인 몸동작 대신 밝고 자연스러운 눈웃음이 가득하다. 자신의 장점을 최악으로 떨어뜨리는 노래만 가지고서도 지금 자리에서 5년을 버텼던 그녀다. 이런 곡을 들고 나왔을때의 위력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정답은 그녀 자신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어떤 옷을 입어야 할지, 머리는 어떻게 만져야 좋을지 고민하지 말고 솔직하게 마음을 보여주라는 노랫말은 매우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U-Go-Girl'은 가수 이효리가 모든 혼란을 뒤로 하고 자신의 매력을 제대로 발견하기 시작한 최초의 순간이다.
이것은 얼핏 보기에 아주 복잡하게 엉킨 듯한 매듭이 원리를 알고 나면 아주 쉽게 풀려버리는 것과 같다. 인위적인 모습을 내세우지 않고 이효리 자체를 음악에 대입시킨다는 발상은 그 자체만으로 [It's Hyorish]를 들을거리 풍성한 앨범으로 만들었다. 소위 섹시컨셉 댄스 가수의 앨범임에도 불구하고 앨범에서 사랑 노래는 수록곡의 절반도 안 된다. 대신 이효리는 곡마다 자신의 존재를 자연스럽게 드러내며 현재의 심경을 노래한다. 그간 자신을 끈질기게 괴롭혀온 시선들을 음악으로 불식시켜 버리겠다고 선언하는 '천하무적 이효리'는 앨범을 여는 주문과도 같다. 단 한번도 제대로 채굴되지 않았던 금광이기에 그냥 삽을 뻗는 것만으로도 캐낼 거리가 마구 나온다. 소녀들을 위한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비법 전수라든가, 멋진 남자로 자라주길 부탁하며 소년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라든가, 언론과 안티를 향한 자세와 스스로에 대한 다짐, 힘들었던 어린 시절에 대한 회상, 20대를 보내고 30대를 맞이한 심경.. 기타 등등. 물론 '텐미닛'과 같은 노래를 부르는 이효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노래도 마련돼 있다. 지금 시점에서 앨범 한 장으로 자신을 이보다 더 많이 보여줄 수는 없을 것이다.

[It's Hyorish]의 유일한 단점은 기대치를 지나칠 정도로 웃도는 앨범이며, 너무 급격한 업그레이드가 이루어져서 지난 앨범과의 연결고리가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난 이 점을 이렇게 파악하려고 한다. 이효리는 음반 활동을 통한 정면승부에서 패배할 때마다, 예능 프로로 돌아가 자신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며 손실을 만회하고 입지를 유지했다. 이게 여러 번 반복되면서 어느 순간 알게 되지 않았을까. 사람들이 자신에게 원했던 것과 자신이 가장 잘 하는 것의 거리가 실은 매우 가까웠다는 걸 말이다. 그리고 이것을 발견하는 순간 그야말로 놀라운 급성장을 이루게 된 것이다. 장담하건대, 이건 그저 시작일 뿐이다. 'U-Go-Girl'은 단순히 곡 잘 받고 안무 잘 따서 얻어걸린 게 아니라 오랜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발견된 것이기 때문에, 이효리가 가수로서 이 아래로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앨범 [It's Hyorish]는 정점이 아니라 기준으로 남을 것이다.
이효리의 그 희귀한 퍼스널리티는 수많은 그녀의 워너비들이 그토록 원하고 흉내내었음에도 절대 도달하지 못했던 특별한 재능이다. 그리고 음악에서 전혀 발휘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위치를 5년이나 유지시켜 줄 수 있을만큼 대단한 무기이기도 했다. 앞으로는 이 재능이 음악을 통해서도 발휘될 것이다. 그 위력이 어떤지는 이미 'U-Go-Girl'의 센세이셔널한 반응으로 증명되고 있다. 덤으로 이효리는 엄청난 연습량과 노력으로 그동안 결점으로 지적되고 있던 라이브 문제마저 해결했다. 흠 잡을 구석이 없다. 매번 슈퍼스타의 간판 앞에서 도망치던 이효리가 이 정도 잠재력을 가지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대단히 놀라운 결말이다. 이 시점에서의 앨범 [It's Hyorish]는 마치 한때 유행하던 퓨전 판타지의 클라이막스를 연상케 한다. 영문도 모른 채 이계에 떨어져 어찌할 줄 몰라하던 나약한 소년이 실은 그 세계를 구해낼 진정한 영웅이었던 것처럼, 과도한 기대와 관심 속에서 허덕이며 혼란을 거듭하던 아이돌 소녀는 사실 대한민국 연예계에서 좀처럼 나오기 어려운 진짜 슈퍼스타였던 것이다.
Track List

1. 천하무적 이효리
2. Lesson
3. U-Go-Girl (feat. 낯선)
4. 사진첩
5. 이발소집 딸
6. Don't Cry
7. 괜찮아질까요
8. Sexy Boy (feat. 휘성)
9. 빨간 자동차 (feat. 김건모)
10. Hey Mr. Big
11. P.P.P
12. My Life
13. Unusual (feat. 서정환)
# by | 2008/08/04 03:03 | 2 | 트랙백 | 덧글(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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